[연구] 버스벨과 심리전 만든 것

 버스에서 내리려고 벨을 누른 후 뒷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내릴 때, 문이 열릴 때까지도 앉아 있다가 당신이 내릴 때 비로소 일어나 뒤따라 내리는 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수고스럽게 벨을 눌렀으며 정차 시 브레이킹에 의한 관성을 선 채로 버티기까지 했는데, 그는 문이 열릴 때까지 편하게 앉아 있다가 내렸다. 똑같은 곳에서 내리면서 당신이 더 힘들었다. 그렇다. 그때의 당신은 그자에게 졌다. 패배자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하차 현실이 여유롭지 않기에 생겨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본 패배의 모습이다. 하차자가 자신 혼자라고 가정할 경우, 벨을 누른 후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가 버스가 완전히 멈추고서야 일어나서 내리려고 한다면 버스기사님은 내릴 사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문을 바로 닫아 버리고 출발할 가능성이 커서 "아저씨~" 또는 "내려 주세요"라고 외쳐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그 상황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닌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눈치가 심하게 보이게 된다. 때문에 벨을 누른 사람은 뒷문과 아주 가까운 자리가 아니라면 뒷문 앞으로 가서 서 있는 것이 정설이다. 하차자가 두 명 이상일 경우에 위와 같은 정설처럼 먼저 벨을 누른 사람이 뒷문 앞에 서 있다면 뒤에 내리는 사람은 편안한 하차를 보장받는다. 정차하면 먼저 서 있던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여 완전히 내릴 때까지 문은 닫히지 않으며, 버스는 출발할 수 없다. 완전히 정차한 후 유유히 일어나서 내릴 수 있는 시간을 앞사람이 벌어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같은 정거장에서 두 명 이상의 하차자가 있을 때 벨을 먼저 누르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서 심리전이 발생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승자의 특권인 '여유롭게 뒤따라 내리기'를 얻을 것이요, 패배한다면 벨을 누를 때 손가락에 묻어오는 세균들의 환호성을 들을 것이고, 정차 시 관성을 서서 버텨야 하며, 자신을 뒤따라 내리는 왠지 미소를 머금은 듯한 승리자를 보며 패배의 절망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차자가 두 명 이상인 일반상황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은 바로 전 정거장에서 하차를 마친 후 출발하는 순간부터이고 목표점까지 가는 동안 하차예정자를 찾아내야 한다. 하차예정자의 대표적인 행동으로는 '짐 꾸리기', '과도하게 창 밖 살피기' 등이 있고, 특히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을 멘다든가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챙기는 자를 발견했다면 그는 거의 반드시 하차예정자이다. 그가 벨을 누르기만을 여유롭게 기다리면 된다. 이처럼 내릴 기색이 있는 자를 발견했다면 바로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먼저 주위를 살피고 있는 당신을 발견했다면, 그는 정색모드로 들어가게 되고 당신이 벨을 누르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절대로 그를 찾지 못하게 되어 먼저 벨을 누를 수밖에 없다. 하차예정자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들키지 않고 탐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식적으로 일단 위치는 뒷자리가 유리하다. (하지만 언제나 뒷자리가 유리한 것은 아니다. 흔치는 않지만 탐색자끼리 동시에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소모전에 빠져서 서로 승리하기 쉽지 않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문 쪽에 앉은 것이 더 유리하다고 하겠다. 또한 하차자가 자신 혼자인 특수상황 또한 문쪽 자리가 유리하다 하겠다) 과도하게 고개를 돌려 살펴서는 안 되고 최대한 눈알 굴리기만을 이용하여 주변을 탐색하도록 하자.
 또 아이템을 이용할 수도 있다. 여성이라면 특히 거울이 유용한데 이것은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자신을 찾는 탐색자에게, "저 여자는 거울을 꺼냈으니 이번엔 내리지 않을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줌과 동시에 뒤쪽을 탐색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아이템이다. 본인은 MP3플레이어의 반사율이 높은 액정을 이용하여 거울과 비슷한 효과를 보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승리에의 길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최대한 뒷자리에 앉아서 들키지 않고 하차예정자를 찾아낸다'
 이것이 전부이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개발하여 승리하는 하차생활을 하길 바란다.



P.S.

 1.
 하차자가 자신 혼자인 특수상황을 조심해야 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적과 싸운답시고 최후까지 주위를 살피며 버티다가 벨 누르는 타이밍을 놓치는 수가 있다. 이것은 최악의 멍청한 경우이다. 자신의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탐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차예정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바로 벨을 눌러주는 센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하차자는 없는 줄 알고 벨을 눌렀더니 뒤따라 내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당신보다 고수이다.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더욱 분발하도록 하자.

 2.
 만약 자신이 이번에 내리지는 않지만, 열심히 탐색 중인 자를 발견했다면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에게 거짓으로 하차예정자의 대표적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승리감에 취해 당신이 누를 벨을 기다릴 것이고 곧 혼란에 빠질 것이다. 반칙이니까 적절히 사용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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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길성근 2008/09/28 10:54 # 삭제 답글

    인도 첸나이에 살고 있습니다. 심리전의 묘미를 버스벨과 연관 스토리는 기가막힌 작전입니다.
    정말 오랬만에 타국에서 웃음보를 터트린 좋은 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심리전을 펼처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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